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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끝을 바라볼 때 by 진

미지 구지연 | 19.06.07 | 조회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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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중 청소년 문화교류 후기

길 위에서 끝을 바라볼 때

  

by 서장관 권진 ()

 

 

 

1. 여행의 의미

    여행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길에서 만난 인연들과 감정들이 얽힐 때, 우리의 여정은 비로소 여행이라 불릴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자칫 관광의 단계에서 끝날 소산이 있다고 한다. 45일 동안 우리가 걸었던 길은 만들어진 길이었다. 수 백여 년 전 연행 사들이 수차례 드나들었던 길. 그 길을 우리가 걸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의 발길이 닿았던, 현재에도 관광지로 불리는 곳에서 관광이 아닌 여행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말이다. 현시대의 길이 아닌 옛길을 따라가 보는 여정은 현재의 모습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야 하는 노고를 담은 여정이기도 했다. 보고 느끼는 것을 넘어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 우리는 이런 여행을 만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2. 우리의 연행

    우리 프로그램의 목적은 연행길을 따라가 보며 몇백 년 전 그들이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껴보는 데 있었다. 스스로 현대판 연행사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 여정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기반으로 했다. 이 장에서는 열하일기의 궤적을 따라다닌 과정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옛 연행사들은 중국 국경을 넘는데 만해도 기본적으로 몇십 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반면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3시간여 만에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연행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찾은 장소는 바로 동악묘였다. 도교사원인 이곳은 갖가지 신령상, 동물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하면 불교, 유교만을 연상했을 뿐 도교에 대해 생각 해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존재감이 약화되었을지언정 고대 중국의 뿌리와 사상은 도교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을 지나고 사신들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 관복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만큼 신성스러운 도교사원이 중국임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한 것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곳을 방문하자 내가 진짜 연행길에 올랐다는 자신감이 들며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기대되었다.

    그 날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유리창이었다. 유리창은 박지원의 절친한 친구 홍대용이 평생의 벗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곳은 서울 홍대와 같은 선비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문방사우를 사며 새로운 벗들과 교우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선비들의 젊은 열정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두 번째 날 일정에는 우리 연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들이 많이 포함되어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었던 것은 바로 자금성이었다. 홍타이지부터 푸이까지 긴 세월 동안 중국을 단단히 지킨 그 성이 매우 궁금했다. 처음 마주한 자금성 옆에는 인민대회당사와 마오 주석 기념관이 위치해 있었다. 웅장했던 두 시대가 만나는 듯 하는 느낌이 들어 신기했다.

    자금성 내부는 굉장히 웅장했다. 박지원은 이러한 자금성의 위압감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그가 거대한 궁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했다. 자금성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토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었다. 내가 만약 조선 사신이었다면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 기분을 이곳에서 깊이 느꼈을 것 같다.

    다음 일정은 국자감과 공묘였다. 국자감은 최고의 교육 기관다운 우아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과거시험과 국자감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전시관 또한 흥미로웠다. 공묘는 중국인들의 유교사상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유교는 중국을 받치고 있는 여러 뿌리들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의 사상적 토대를 이룸으로서 문화의 근간을 형성한 것이 바로 이 유교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이 유교문화는 공산당이 내세운 문화혁명의 이름으로 철저히 탄압받았다. 비단 유교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대부분의 문화양식이 이 시기 파괴되었다. 결국 공산당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는 이 생각은 처참히 무너졌고 중국은 다시 문화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최근 중국 내 옛날보다 위상이 약해진 공자를 다시 대두시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생각했을 때 공묘는 중국인들에게 더욱 소중히 여겨지리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우리나라 선비들의 학문에 기반이 된 성리학의 기본이 된 유학에 반골 기질이 심한 박지원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자리를 잡은 유교가 두 나라를 연결해줄 새로운 고리가 되진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했다. 

    셋째 날 문화교류를 무사히 마친 우리 일행은 그 다음 날 마침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피서산장에 방문했다. 화려한 색감을 가지고 있지만 단단하고도 소박한 골격을 갖춘 건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금기의 첫 문을 연 강희제에 의해 지어진 여름 별장이다. 그의 후손이자, 그가 만들어놓은 황금기를 이어나간 건륭제, 옹정제 또한 이곳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이곳이 외교적, 안보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변방 지역으로, 외부의 다른 민족들과 접해 있었기에 이곳을 수호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름답기만 한 피서산장에 그런 일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연암이라면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연암 일행은 자금성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문했을 때 하필 황제는 열하로 휴가 차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그들, 한국에서 중국까지 말 못할 고생을 해왔기에 일행들은 불평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연암은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의 여행길에서 그랬듯이 유쾌하게 길거리의 많은 이들과 어울리며 여행을 이어나간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며 기뻐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특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었다. 피서 산장에 와 보니 그의 낙천적인 태도를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안고 나는 다음 목적지인 보타종승지묘로 향했다.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 사원이다. 건륭제가 자신의 환갑과 어머니의 팔순을 기념하며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열하에 당도해 황제를 만난 박지원 일행은 황제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바로 티베트 불교의 2인자인 판첸 라마를 만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일행들은 소위 말하는 멘붕에 빠졌다. 조선은 당시 엄격히 불교를 금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지원의 기분은 어땠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나는 솔직히 그 시대에 맞지 않게 개방적인 박지원의 태도가 부럽기도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비록 어른이 된 이후에는 실학이라는, 성리학과 정 반대인 사상을 피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학문적 근간은 성리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이것은 자신이 본래 알고 있던 것들을 타파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통해 더 새로운 세상과 진리를 맞이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사마대만리장성에 올라 광활한 풍광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절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 당시의 연암과 지금의 우리들을 곱씹어 보았다. 참으로 꿈만 같았던 연행이었다. 연암도 이러한 감정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라고 믿는다.

 

 

3. 배움

    여행은 배움의 과정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간 여행을 하며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그 규모가 워낙 장대해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볼 수 있는 소규모의 길을 가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결국 여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의 방황과 지침을 해소하고 세상의 새로운 면들을 배울 수 있다.

    사실 난 아직 살아온 세월이 짧기에(?) 그다지 많은 여행을 해보진 못했다. 내가 배움을 깨닫는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가족 여행, 수학여행의 이름으로 떠난 여행에서도 분명 얻은 것이 있을 테지만 실질적으로 나에게 와닿진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이번 여행에서는 내 스스로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는 구체적인 단어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도 있었지만 추상적으로 와닿은 것 또한 꽤 많았다. 지난 날들의 여행과 이번 여행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의외로 해답은 간단한 곳에서 나왔다. ‘주체성중심을 에 두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여행 전 사전 프로그램을 통해 꼼꼼히 여행 전 짐을 꾸리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을 더욱 크게 했다. 따라서 이번 여행에서 얻은 점은 이 전의 여행들에서 얻은 것들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첫째, ‘찾아보기의 재미를 느꼈다. 중국에 도착한 첫째 날, 우리 팀은 돌돌쌤의 제안으로 한국과 중국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소소한 과제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을 더욱 세심하고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비록 찾아낸 것들은 신호가 똑같이 길다.’, ‘ 중국은 한국에 비해 도심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중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분명히 큰 도움을 주었다. 중국의 분위기가 더 확실히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둘째, 다름을 통한 다양함을 배웠다. 중국은 엄청난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어느 사회든 나름대로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지만 중국은 워낙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 그 다양성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내가 첫 번째로 느낀 다양성은 베이징 내의 것이었다. 보통 어느 한 도시의 분위기를 한 단어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베이징은 그럴 수 없는 곳이었다. 현대식 건물들과 문화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었으며 외국의 것과 중국의 것이 공존했다.(가령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꾼 외국 프랜차이즈 같은 것들 말이다.) 두 번째는 민족의 다양성이다. 보타종승지묘를 찾았을 때 건륭제 시기 제작된 비석을 보았다. 비석은 4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 면마다 한자, 만주족 문자, 티베트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청을 세운 민족인 만주족, 라마교의 발상지인 티베트, 당시 중국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한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상생을 택한 그들의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4. 길 너머를 생각하다

    15소년들, 그리고 두 분의 선생님들과 함께한 여행은 중국에 실제로 머무른 5일 뿐만이 아닌, 올해 여름 전체를 차지한 주된 사건이었다. 여행을 마친 우리는 일상이라는 또 다른 여행길에 올라섰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 길을 바라보는 혜안을 길렀다. 각자의 길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박지원이 열렬히 주창한 처럼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사람이다. 여행을 위해 새로 만난 사람들부터 중국이라는 환경에서 마주친 엄청난 사람들까지. 우리 여행의 모델이 되어준 그 옛날 연행을 떠난 이들도 우리 여행의 동반자였더랬다. 우리 팀은 여행에서 상당히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셈이다. 조선의 이야기부터 청의 이야기, 대한민국 그리고 현재의 중국 이야기. 이 경험을 통해 결국 내가 내린 결론 또한 사람이다.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겁다. 옛 사람들과 현대인들의 생각을 연결하는 것이 재미있다. 외부의 것들을 배재하고 나라는 인간에게 집중하는 것 또한 매력적이다. 소중한 이들과 생각을 나누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것이 내 여행의 최종 목적지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그치지 않고, 내 결론들을 안은 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가이드였던 박지원처럼, 5일 동안의 우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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